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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정업원 본문

▣ 아그 ▣ 문화 소통가/조선

[후기] 정업원

아그쌤 2007. 12. 6. 17:12

일     정

답사장소

만  남         장  소

1 차

12월 6일 목

정 업 원

6호선 창신역 4번출구 방향

2 차

12월 14일 금

연산군묘

쌍문역 2번 출구 방향

3 차

12월 19일

광해군묘

1. 청량리역에서 파랑271버스 중랑교에서 하차 도시형 165-3

   청량리역에서 260,270번타고 휘경동입구에서 도시형 165-3번 타고 (53분소요)

2.금곡역에서 55, 9-1, 165-3, 7-4, 23를 타고 송능교, 학다리앞에서 하차 약 20분소요

4 차

12월 26일

탕춘대성

홍제역 1번 출구

 

오전 10시 창신역 4번출구로 나왔습니다.

자료는 여기저기 많이 나와있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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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감정기를 나타내듯 채석장길이 보이고

동망봉이 있던 산의 능선이 일제를 거치면서 맨 살을 드러내놓고 있어서 을씨년스런 날씨만큼 추워보였다.

여기 저기 옛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좌우로 갈라진 길을 걸으니 새삼 어릴적의 골목길이 생각이 난다.

 

정순왕후를 아시는가? 그녀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간택된 인물이다. 정권 다툼 속에서 단종은 1455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고, 정순왕후는 불과 16세의 나이에 의덕왕 대비가 돼 수강궁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456년,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상왕이 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다.

지아비는 유배를 떠나고 그 후 궁궐에서 쫓겨난 송씨는 지금의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간삼간을 짓고 한 많은 여생을 이어간다. 정업원이라 이름 붙여진 그 곳에서 함께 쫓겨난 세 명의 시녀들이 해온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근처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향해 조석으로 단종이 무사하기를 빌었지만 기원과 통곡은 허사였다. 왕비의 오열과 궁핍을 안 마을 여인네들이 줄을 서서 쌀과 나물을 사립문 위로 던져 놓고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부녀자들이 정업원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을 금지했다.

부녀자들은 다시 지혜를 짜냈다. 정업원 인근에 금남(禁男) 시장인 채소전을 열었다. 금남이니 감시하는 관리가 접근할 수 없었다. 이를 틈타 여인네들은 곡식과 채소를 정업원 담 너머로 던졌다. 세월이 흘러 세조는 자신과 가족에게 액운이 겹치자 참회하고 송씨의 비참한 생활을 전해 듣고 정업원 근처에 영빈전이란 아담한 집을 짓고 궁핍을 면할 넉넉한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그것을 받지 않았다고 전한다.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60년 이상을 그녀는 홀로 이곳에 머물렀다.

정순왕후 송씨는 조선왕조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단종과 헤어져 궁 밖에서 평민처럼 살았지만 언제까지 단종만을 그리며 한 많은 세월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국모로서는 유일하게 백성들 속에 살면서 당시 주변의 가난한 백성들의 삶과 직접 대면하였고, 비로소 백성의 어머니가 되었다. 처음에는 동네 여인들이 몰래 가져다주는 채소를 받아먹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염색업을 하며 자립하고 정업원이라는 비구니 절의 주지가 되었다. 그녀는 그저 한 많은 여인이 아니라 남편 단종을 대신하여 국모로서 백성을 보듬으며 살다간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어쩌면 궁 안에서만 살다 죽은 다른 왕비들보다도 진정한 의미의 국모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종은 비운의 왕으로 기억되지만, 정순왕후는 우리 여성의 개척자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궁에서 살았던 3년의 세월보다 궁 밖에서 살다간 60년의 세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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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루(雨花樓)

꽃비가 휘날린다는 뜻을 가진 서울 숭인동 소재 청룡사 우화루. 유배지로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마지막 밤을 지냈다는 곳이다. 단종과 송씨가 영원히 이별한 장소라는 의미로 영리정(永離亭)으로도 불렀다.

○ 정업원(定業院)

종로구 숭인동에 정업원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출가 후 남편을 일찍 잃은 왕의 후손들이 비구니가 돼 여생을 보낸 곳이다. 조선시대의 왕비는 왕이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대궐에서 살았고, 자식을 낳은 후궁들의 경우에는 장성한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식도 없이 갑자기 과부가 된 후궁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여승이 되었는데 수절을 하면서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정업원은 조선 초기 과부 후궁들이 머리를 깎고 모여 있던 절이다. 그 이름의 뜻이 재미있다. '업(業)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 사는 집'. 그 업이란 국왕을 모실 수 있는 기쁨과 국왕만을 모셔야 한다는 일종의 자물쇠인 것이다. 정순왕후 송씨 역시 1453년 수양대군이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내치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벌인 계유정란으로 졸지에 남편과 이별을 하고 나서 여생을 보낸 곳이다. 원래 정업원은 궁에 있던 법당이었다. 애초에는 내불당이라 불렀으나, 유생들의 반발에 정업원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 동망봉

일제 점령시 일본인들이 헬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봉우리를 깎아 훼손됐고 후에 채석장으로 이용해 지금은 과거 흔적을 찾을 수 없고 현재 동망봉의 남은 능선은 모두 근린공원인 승인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단지 문화재청에서 세운 작은 비문 하나가 “영조가 친히 동망봉 이라는 글씨를 썼으나 채석장으로 바뀔 때 그 글씨가 떨어져 나갔다”는 설명을 담고 있을 뿐.

○ 자주동천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며 자주색 물감을 들였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샘.

 

단종과 단종비의 마지막 이별장소인 '영도교'를 끝으로 오늘의 하루 여행은 끝을 맺고 중고서적을 뒤적이는 재미도 쏠쏠하다.

 

2007.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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