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의 하루
[스크랩] 남한 유일의 고려행궁 유적지, 파주 혜음원지를 들르다 본문
고려시대에는 화려한 귀족문화와 불교문화가 발달했던 나름의 황금기 시대이죠?
경기도 파주시에서 고려시대의 문화를 잘 담겨진 터가 나왔다고 하는데요. 이 곳에서 고려청자, 칠기, 기와 등 여러가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출토되었던 유물들에는 "혜음"이라는 명문이 세겨져 있었기에 파주 혜음원지라고 합니다.
이 곳은 남한에서 발굴된 유일한 고려시대 행궁유적이기도 하고, 현재 고려시대 궁궐의 규모와 배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3원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그렇다면 혜음원이란 어떤 곳이었을까요?
고려시대 때에 불교 문화가 많이 왕성하였으며, 상업이 발달하면서 교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불교문화의 발달로 불교의 중흥은 신앙의 차원을 넘어 사회구휼 활동으로 영역을 넓혀나가고자 했는데요.
기존의 교통의 요지가 있는 사찰에 역원의 숙박기능을 추가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고려시대의 원(院)이라고 했으며, 도봉원, 고달선원, 희양원 등 3원이 대표적입니다.
혜음원이 위치한 지역인 혜음령 또한 당시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어요.
그래서 왕래가 빈번하였으나, 산세가 험하고 인적이 드물어서 도적이나 맹수로 인한 희생자가 1년에 수 백명이 달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혜음원을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1120년,예종 15)
혜음사에서 출토된 금동불을 보며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지영
혜음사를 설립하게 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하급관리였던 이소천이었습니다.
이소천은 왕명을 받들고 남쪽에 순시를 다녔는데, 위와 같은 상황을 보고 혜음령에 원(院)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원(院)의 설립을 통해 도적과 맹수들로부터의 위험성을 줄이고 여행자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죠.
또한, 민간 부담을 덜고 국가재정을 고려하여 승려들을 원을 설립하는 데에 동원할 것을 제안했답니다.
이소천은 묘향산으로 가서 "옛날 스님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을 보면 두려워 하지 않고 희생심을 발휘하였다. 누가 나를 따라 일을 해보겠는가."라고 승려들을 독려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는 자가 주지인 혜관을 비롯하여 100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혜관의 재정적인 지원 외에 응제나 민청 같은 승려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단기간 내에 혜음사 창건이라는 불사(佛事)를 이룩하였습니다.
그 이후 혜음사는 숙박시설이 더해져서 혜음원으로 발전되었겠지요?^^
파주 혜음원지 전경 및 추정모형 ⓒ고지영, 문화재청 및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혜음원지에서는 세 가지 구역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요.
사찰인 혜음사(寺), 여행자에게 숙박과 편의를 제공했던 혜음원(院), 고려왕이 남경(서울)행차 시 머물렀던 행궁. 이렇게 세가지 복합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할까요?
혜음사와 혜음원의 명문기와
혜음사명문평기와 ⓒ고지영
이건 혜음사 터에서 나온 대표적인 명문기와예요. 명문기와는 기와 표면에 명문(銘文)을 새긴 기와인데요.
통일신라 때 부터 제작되어 고려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답니다.
명문기와는 보통 절이름, 제작기호, 제작연대, 사용처 등이 새겨져 있는데요. 그 사이에 놓여진 내용은 기와에서 탁본한 것입니다. 그곳에 혜음사에 관한 설명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군요 .
혜음원명문기와 ⓒ고지영
이 기와는 위와 명칭이 비슷하지만 많이 달라보이죠?
위엣것은 평평한 암키와라면, 이것은 수키와 명문기와입니다. 위의 기와에 두 개의 눈 같은 게 보이시죠?
저것는 고려시대에서만 나타나는 대표적인 문양으로 귀목무늬라고 불린답니다.
연화무늬가 계승, 발전되어서 생긴 무늬랍니다.
두 개의 눈 사이에 혜음원(惠陰院)이라는 명문이 보이는군요.
고려청자와 왕실문화, 고려행궁의 모습을 엿보다.
혜음원에서 발굴된 청자로 고려청차 전성기를 알 수 있다 ⓒ고지영
또한 고려왕이 남경 행차 시 머물렀던 행궁의 위엄을 보여주듯 12세기 고급 고려청자가 대량 발굴되었습니다.
고려청자는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그만큼 왕족문화를 잘 보여주는 듯 하군요.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청자의 제작지는 고려 왕실에 청자를 공급하던 강진과 부안으로 밝혀졌고, 이는 고려왕의 남경행차시 머물렀던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가장 많이 출토된 청자는 44%를 차지한 접시이구요. 대접, 완, 대발, 잔, 뚜껑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고려 청자에서의 여러 시문방법과 문양들 ⓒ고지영
청자 안에서도 여러 시문방법들과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구연에 금속테를 두른 접시가 확인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금속테는 주석으로 밝혀졌는데요, 고급품에만 의도적으로 금속테를 씌운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다기 ⓒ고지영
또한 고려시대에서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차 문화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왕과 귀족, 승려 등 상류층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차를 마셨다고 합니다. 차를 마시는 이유는 차의 맛과 약효를 얻기 위함이 가장 이유가 컷고, 차를 달이는 행위 자체에서도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던 것 같네요 ^^
고려시대의 마루장식 기와
고려시대 마루장식 기와 ⓒ고지영
고려시대에는 마루장식기가 이전시기에 비해 훨씬 다양하게 발달되었는데요.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곳곳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혜음원지에서 발굴된 장식기와를 볼 때에는 용마루에는 어룡형의 치미(鴟尾)를 올렸고,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토수를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의 날개를 본따 만든 치미나 새모양기와는 설치한 건물과 건물주에게 하늘의 뜻이 닿아 있음을 의미하여 이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하네요.
고려시대 칠기와 직물
칠기굽접시 ⓒ단국대학교
혜음원지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유물은 칠기인데요~
5차 발굴조사 중 11단 건물지 북쪽수로에서 6점의 칠기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적 분석결과 칠기는 구연부, 동체, 바닥, 금부분을 따로 제작하였으며, 바닥에는 "惠陰"이라는 명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여기에 사용한 직물이 면직물인데요.
이는 문익점이 14세기 훨씬 이전에도 한반도에서 면직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이 혜음원지에서는 수 백점의 막새기와와 취두, 용두, 잡상 등 특수기와, 여러 종류의 명문기와들이 수습되었습니다. 또한 이외에 청자, 중국백자, 동전, 토기 등 생활용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틀어보아 고려 문화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9차례 정도 발굴이 진행되었고 양적, 질적으로 12세기 고려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혜음원지의 발굴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고려행궁의 유적지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혜음원지는 고려시대의 원(院)으로써, 고위층 뿐만 아니라 민중들까지 껴안으려 했던 사랑이 남아 있는 터로 남아 있는 듯 합니다.
▲제7기 문화재청 대학생기자단 고지영 기자(highjy9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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