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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의 하루

[스크랩] 포천 창옥병 암각문 본문

▣ 아그 ▣ 문화 소통가/조선

[스크랩] 포천 창옥병 암각문

아그쌤 2015. 11. 28. 03:10

포천 창옥병 암각문(포천 향토유적 41호)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영평천 강가에 위치한 창옥병 암각문 전경

창옥병(蒼玉屛)은 포천시 창수면에 있는 영평8경의 하나이며, 글씨를 쓴 사람은 당시 대명필가인 석봉(石峯) 한호(韓濩), 바위에 새긴 이는 신이(辛夷)라는 사람이다.

▲ 박순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설립된 옥병서원 앞쪽에 창옥병 암각문 안내판이 있습니다.

▲ 안내판 뒷편의 창고 우측으로 돌아가면 최근에 세운 신 안내판이 있으며, 안내판 전방으로 직진합니다.

▲ 안내판 바로 전방에 바위가 위치하고 있는데 내려 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바위 전면에 각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창옥병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 1523~1589)이 즐겨 찾던 경승지이다. 15년간 영의정에 재직하던 그가 영평으로 거처를 옮긴 때는 1586년(선조 19년) 8월이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았다.

▲ 한석봉이 썼다는 창옥병 암각문

▲ 전방에서 바라 본 창옥병 암각문 모습

▲ 가까이 바라 본 창옥병 암각문 모습

▲ 우측에 새겨진 산금대(散襟臺) 각자

▲ 송균절조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고 크게(60×60cm) 새겨진 모습
글씨는 한석봉이 썼으며, 선조가 박순을 헐뜯는 자를 변경으로 유배 보내면서 내린 하교의 내용으로 “박순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와 지조, 물과 달같이 깨끗한 선비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극찬한 내용이라고...

이때 선조는 여러 차례 만류하였지만 스스로 물러나 지금의 포천시 창수면 옥병동에 거주하였다. 박순은 거처를 영평에 자리 잡은 뒤 창옥병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지내면서 1588년(선조 21년) 빼어난 8개소에 이름을 붙였다.

▲ 우측에도 영평천을 따라서 길게 바위가 있는데 각자들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어 가 보았습니다. 좌측으로 길이 있었네요...

▲ 각자 좌측의로 계단을 오르면 바위 위로 오르게 됩니다. 처음부터 이 곳(바위 위에서 우측편)으로 내려 오는 것이 편합니다.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688번지에 옥병서원이 위치하며, 옥병서원 아래로는 영평천이 흐르는데 이곳에 창옥병 암각문(蒼玉屛巖刻文)이 새겨져 있다.

▲ 수경대(水鏡臺) 각자 모습

▲ 여름에는 물이 차 있어서 영평천의 바위와 바위 사이로 이동하기가 어렵네요... 얼음이 어는 겨울에 와야 제일 좋을 듯 합니다.

▲ 바위 상단에는 사암 선생의 ‘제이양정벽(第二養亭壁)’이란 시를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의 글씨로 새겨져...

한자로 ‘송절수정균조월신(松節水精筠操月神)’, ‘산금대(散襟臺)’, ‘곡조시시일개광상적적산군서매련백학대전수재출산문편대어(谷鳥時時一箇匡牀寂寂散群書每憐白鶴臺前水纔出山門便帶淤)’ 등이 새겨져 있다.

▲ 수경대(水鏡臺)에 새겨진 제이양정벽(第二養亭壁)

곡조시시문일개(谷鳥時時聞一箇)  골짜기에 새소리 때때로 들리고
광상적적산군서(匡牀寂寂山群書)  적적한 침상위엔 책들만 나뒹구네
매련백학대전수(每憐白鶴臺前水)  안타깝구나! 백학대 앞에 흐르는 물이
재계출문편대어(?繼出門便帶?)  겨우 산문을 나오니 흙탕물 일세

▲ 수경대를 겨우 건너...

▲ 수경대 방향으로 돌아 본 모습

선조가 8자로 써서 하교한 글과 박순 선생의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이라는 시를 김수증이 1700년경에 써서 암각한 글도 있다.

▲ 전방으로 조금 더 가면 바위 위쪽에 각자가 보입니다.

▲ 바위 전면에 토운상(吐雲床)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창옥병 암각문은 관련한 사실이 문헌 자료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 구전에 근거하거나, 단순히 경승지를 유람하다 즉흥적으로 각자한 자료와 구별된다.

▲ 강가 바위에 새겨진 와준(窪尊)

▲ 토운상 각자에서 전방으로 더 가 봅니다.

▲ 토운상 각자 방향으로 돌아 본 모습

▲ 바위가 물 안쪽으로 연결된 곳 끝 쪽에도 무언가 보입니다.

▲ 다시 뒤로 바라 본 모습

▲ 반달 모양의 바위에 새겨진 와준(窪尊)

또한 하나의 암각문이 각자된 것이 아니라, 무려 11점의 암각문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시된다. 우리나라 서예사에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 디지털 포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청렴담(淸泠潭)

▲ 조금 더 가면 바위 벽에도 글씨가 보입니다.

▲ 세로로 새겨진 청렴담(淸泠潭) 각자. 주변에 각자가 더 있다는데 다른 일정이 있어서 이만...

▲ 청렴담 뒷편으로 도로까지 올라오니 좌측에 옥병서원 홍살문이 보입니다.

포천(抱川)에서 韓石峰 선생 글씨 다수 발견                                                                                    연합뉴스 1993.10.21

 

선조(宣祖)의 윤음(綸音) 등 암각문 10점 문화재급

(포천(抱川)=연합(聯合)) 경기(京畿)도 포천(抱川)군 蒼水면 주원리 蒼玉屛 계곡에서 조선시대 명필 韓石峰선생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여럿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21일 포천(抱川)군에 따르면 지난 7월22일부터 26일까지 5일동안 이 지역 바위 등에 새겨진 巖刻文 11점에 대해 조사를 벌였던 강남대 국문과 洪順錫교수(한문학)가 최근 이 글씨 가운데 10점이 石峰 韓濩선생의 것으로 밝혀졌다고 알려왔다는 것이다.

이번에 확인된 石峰선생의 글씨 가운데 선조(宣祖)의 윤음(綸音)(임금의 말씀)인 '松筠節操 水月精神'(소나무 대나무와 같이 절개가 곧고 물,달과 같이 정신이 맑다)이라는 문장을 적은 8글자는 가로,세로 60㎝의 대자(大字)로 쓰여져 가장 크고 선명하다. 나머지 9점의 글씨는 계곡 군데군데 바위 등 경승지에 붙인 이름을 행서체로 쓴 것으로 散襟臺, 水鏡臺, 吐雲床, 淸鶴臺, 淸冷潭, 二養亭, 玉屛洞 등이다.

洪교수는 영의정을 지내다 당쟁(黨爭)에 휘말려 이곳에서 은거생활을 하던 思庵 박순(朴淳)선생의 二養亭記에 "백운산 기슭 永平에 은거하던 중 바위 등에 이름을 짓고 1558년 韓濩에게 글씨를 받아 신이(辛夷)를 시켜 바위에 새겼다"는 구절이 있어 이 글씨가 石峯선생의 것으로 확인됐으며 4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글씨의 형태가 선명하게 남아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아주 높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들 巖刻文은 옛 문인들이 유람을 다니다 즉흥적으로 써서 새긴 것들과 달리 당시 思庵선생이 지은 경승지 이름을 당대의 명필인 石峰선생에게 맡겨 작업한 것인데다 한곳에 집중돼 문화적 가치가 한층 크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글씨가 발견된 창옥병 계곡은 永平川 기슭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빼어난 경치를 이루는 곳으로 思庵선생을 배향한 玉屛書院이 위치해 있다. 石峰 韓濩선생(1543-1605)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로 손꼽히고 있으나 정작 그의 친필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포천 창옥병 암각문 위치도

 지도 하단의 시작부분으로 내려가서 우측 9m 지점에 창옥병 암각문이 위치.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주원리 674-1

지도 상단의 화살표 지점에 창옥병 암각문이 위치. 지도 하단의 포천시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한국의 국보와 보물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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