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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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7일 인천 국제공항, 일본으로부터 매우 특별한 화물이 도착했다. 수많은 취재진의 관심이 집중된 화물, 일제강점기 일본이 가져간 47책의 조선왕조실록이었다. 그것이 93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93년 만의 귀환, 조선왕조실록]
1. 실록의 수난사
지난 7월 7일 반가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조선왕조실록 47권이 돌아왔다는 소식입니다. 일본으로 간지 만 93년 만에 돌아온 것인데요. 이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의 귀환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무엇보다도 원래 있던 그 자리, 그러니까 한반도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입니다. 이제 모든 실록이 제자리를 찾게 되면서 인류 유산으로서의 조선왕조실록은 그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반환된 오대산 본을 비롯, 오늘날까지 실록이 온전히 전해지는 데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럼 먼저 이번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이 어떻게 돌아오게 됐는지 와 함께 우리의 조선왕실록이 겪은 수난부터 보겠습니다.
지난 4월, 일본의 도쿄 대학. 한국측 인사들의 방문이 있었다. 종교계, 학계, 정계인사들로 구성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였다. 이들은 도쿄대학을 상대로 조선왕조실록의 환수를 주장했다. 도쿄 대학에는 환수위원회의 주장대로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고 있었다.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도쿄대의 조선왕조실록, 모두 47책이다. 한국의 환수위원회는 이 책을 반환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환수위원회의 활발한 활동에 일본측의 반응이 있었다.
사토 신이치 [도쿄대 부학장]
"도쿄대학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이 서울대학에 인도된다면 학술발전 면에서나 교류증진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 두 대학이 합의한다면 그걸로 조선왕조실록 인도는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난 7월 7일, 마침내 조선왕조실록 47책이 돌아왔다. 돌아온 실록은 곧장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일본측은 조선왕조실록을 도쿄대에서 서울대에 ‘기증’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반면 우리측은 ‘반환’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이미 다른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규장각에 도착한 실록, 그러나 아직은 공식적으로 도쿄대의 소유였다. 도착 일주일 후, 공식 인도 인수식이 열렸다. 마침내 조선왕조실록 47책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반출된 지 93년만의 일이었다.
이상찬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내사고에 보관돼 있던 실록이 유일하게 오대산 사고본 실록만 일본에 나가 있었는데 그게 이번에 한반도로 돌아오므로 내사고에 소장돼 있던 실록들이 모두 한반도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돌아온 실록은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오대산 월정사는 반환된 실록과 인연이 깊다. 이번의 반환에도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이 책이 오대산 사적입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에는 반환된 실록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사적기에 따르면 월정사는 실록 수호사찰, 즉 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조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었다. 이 밀부는 조정에서 월정사 주지에게 내린 것이었다.
정념 스님 [월장사 주지]
"이 사고는 월정사 산속 즉 사람의 인적이 드문 화를 입지 않는 곳 중요한 명당을 사명대사께서 선정을 해서 거기에 사고와 선원보각을 가져다가 지웠다. 그래서 바로 월정사 주지는 사고를 수호하는 이 수호 총습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 사고 옆에는 수직사라는 관리사찰이 있어서 거기에 스님들이 기거하면서 바로 그 사고를 수호해온 바로 이 사고수호가 이 월정사로는 이 산중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였다는 그런 것들을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월정사 바로 위쪽, 오대산 사고가 있다. 월정사가 지켰던 바로 그 사고이다. 이곳에 보관되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93년 전,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두 차례에 걸쳐 모두 787책이 반출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왕조 실록의 첫 수난은 임진왜란 때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은 네 부를 만들어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의 네 군데 사고에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고 전주사고만 무사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의 경기전, 이 경기전 건물도 정유재란 때 불탔다. 그러나 태조의 어진은 화를 면했다. 전주 사고는 경기전 곁에 있었다. 바로 이곳에 보관된 실록만이 화를 면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전주 사고본을 바탕으로 다시 네 부를 만들었다. 이후, 사고는 모두 산으로 올려 보냈다. 강화의 마니산을 비롯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등 외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곳에 사고를 짓고 실록을 분산 배치했다.
이성무 박사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임란 이전에는 사대 사고가 전부 시내에 있었습니다. 시내에 있다 보니까 임란이 일어나서 왜병이 오니까 제일먼저 불타는 거에요. 정말 요행으로 전주사고가 살아남아 가지고 이걸 바탕으로 해서 다시 찍어가지고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람이 즉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들어간 거죠."
이후 실록은 또 다시 옮겨 다녀야 했다. 전북 무주의 적상산 사고, 이곳은 묘향산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을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옮겨온 곳이다.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 사고의 실록은 화재로 인해 바로 옆의 정족산으로 옮겼다. 일제 강점기, 조선왕조실록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조선총독부는 각 사고에 분산보관하고 있던 실록을 서울로 모았다. 정족산과 태백산 사고본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적상산 사고본은 창경궁 장서각으로 옮겼다. 오대산 본 만이 그 자리에 있다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1910년대에 동경제대 시라토리교수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반도사편찬 사업이 계획돼 있었습니다. 결국 식민통치를 위해서 한국 역사 전사를 서술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이제 사료가 필요해서 당시 아직 서울로 올라오지 않은 오대산본 실록을 현지에서 그대로 주문진항을 통해서 바로 가져간 것 같습니다."
국내에 남은 실록은 또 다른 수난을 겪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실록도 전쟁을 겪어야 했다. 적상산 본이 북한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태진 교수
"정족산 본, 태백산 본 두 개는 부산으로 이미 피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6.25 전쟁 중에 그래서 북한에 당시 역사학자들이 상당히 작업이 왕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서울에 남아 있는 적상산본을 평양으로 가져오자 해서 가져간 것입니다."
평양의 인민대학습당. 한국전쟁 때 가져간 적상산 본 실록이 보관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정족산 본은 서울대 규장각, 태백산본은 부산의 국가기록원에서 보관중이다. 한편,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오대산본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의 실록이 불탔다. 겨우 73책만이 전해지다가 1932년 27책이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난 7월, 숱한 시련을 겪은 나머지 47책이 마침내 돌아왔다. 돌아온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국립고궁 박물관에서 일반인에게 공개중이다. 이 반환으로 이제 전해지는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한반도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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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록의 현황
그야말로 이제는 돌아와 우리의 품에 안긴 조선왕조실록, 돌아온 오대산본 47책도 절차를 밟아 곧 국보로 지정될 거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돌아온 실록을 어디에 보관할거냐 등의 문제를 두고 지금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제 다시는 우리의 조선왕조실록이 더 이상 수난당하지 않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록물로 영원하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 실록은 세군데 나뉘어 보관중인데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부산의 국가기록원, 그리고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 안전한 상태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모두 1187책, 1706권이나 되는 엄청난 이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 그렇다면 실록은 도대체 어떤 기록이길래 세계인이 인정하는 문화유산이 된 것일까요?
박노원 아나운서
네 우리의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6천 4백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물입니다. 얼른 실감이 잘 나지 않을 텐데요. 이 양은 여러분이 잘 아는 천자문 6만 4천권 분량인 것입니다. 실록 중의 실록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을 만나보겠습니다.
규장각 지하 수장고, 몇 겹의 육중한 문을 지나자 서고가 나타난다. 시대와 사고본에 따라 책 표지와 크기는 약간씩 다르지만 실록은 일정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과 정치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각 분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자연재해에 대한 기록도 그 피해 상황 등이 매우 자세하다. 명종 1년에는 집중호우로 광주에서 80여 채의 민가가 유실 혹은 침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사회에 큰 방향을 일으켰던 사건들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광대 공길, 그리고 대장금등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도 등장한다.
신병주 교수
"왕의 정치에 관한 내용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경제라든가 일상에 관한 내용들이 풍부합니다. 한 예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히트를 쳤던 장금이라든가 공길과 같은 인물도 실록의 의녀와 배우로 등장하는 실존인물입니다."
또한 실록은 매우 치밀하게 기록되었다. 작은 글씨는 세주, 즉 각 사안에 대한 해설인 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신 왈(史臣 曰)’이라는 사론이다. 즉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들의 평가인 것이다. 사관들의 평가는 비록 그 대상자가 왕이라 해도 매우 신랄했다.
이성무 박사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춘추필법에서 나왔다고 봐야죠. 유교의 역사관이니까 춘추필법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나 인물들에 한 일들을 포폄 잘한 건 잘했다고 하고 못한 건 못했다고 하는 그런 평가거든요. 춘추필법은 칼날과 같아서 올바른 것을 그르다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르다는 것을 올바르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엄정한 사실주의 입니다. 거기에는 또 도덕성까지 결부되는 것입니다. 유교도덕에 합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 엄정하고 객관적인 조선왕조실록은 무려 6천 4백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물이다. 이의 가치를 인정해 유네스코는 조선왕조실록을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실록은 어떨까? 명실록은 중국 최초의 실록이다. 명나라 실록의 원본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대만에서 여러 기록들을 종합, 명실록 영인본을 만든 것이 원본 대신 전해지고 있다. 명실록은 모두 2964권, 양으로는 조선왕조실록을 능가한다. 그러나 그 서술형태가 조선의 실록과 사뭇 다르다. 명실록은 한 면이 10행 20자,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15행 30자 훨씬 빼곡하다. 1년 치 기록만 보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은 명실록의 두 배가 넘는다. 가장 큰 차이점은 그 내용에 있다. 명실록은 황제 중심의 기록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사관의 평가인 사론이 없다. 이는 역사 기록이 황제 권력의 영향을 받았다는 방증인 것이다.
정구복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실록은 당시 실록이 편찬되면 다음 황제나 뒤의 대신들까지도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적 평가인 사론이라는 것이 실릴 수 없었다는데 비해서 조선왕조실록은 왕은 물론 모든 관료도 실록이 편찬된 뒤에는 일체 볼 수 없는 국법에 의해서 사론이 작성될 수 있었습니다."
청나라 실록은 그 양에 있어서 가장 방대하다. 모두 4404권, 그러나 청실록은 한자, 몽골어, 만주어 등 세 개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삽화까지 곁들여 있어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한편 일본에도 실록이 있다. 삼대실록 역시 사관의 평가인 사론이 없는, 일반적인 사실만 기록한 역사서로 분류된다. 문덕실록 역시 양이나 내용면에서 빈약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나마 이들 실록도 중세 이후 막부정권시대에는 사라지고 만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다른 나라 실록들은 대체로 정치적인 기록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선실록은 그뿐만 아니라 생활환경에 관한 것 또는 생활 속에 일어나는 일들 아주 사소한 것 까지 다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전문이상이라든가 기상이변 그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후재, 한재 등 이런 것도 있고 뿐만 아니라 성격인 문제로 소송이 붙는다든가 사회적 무리가 생겼으면 그런 것이 또 보고되어 있고 그리고 대소의 송사로 벌어지는 이런 다양한 문제들이 다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생활상이 다 드러나는 드러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대학고 치밀한 기록으로 조선의 정치, 생활사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역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조선왕조실록, 이는 실록 중의 실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국역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처음 시작했다. 1968년 처음 번역을 시작한 이후 1971년에는 민족문화추진위원회도 합류했다. 한글 번역에 사용된 실록은 태백산 사고본이었다. 세종실록을 시작으로 1993년 번역이 끝난 조선왕조실록, 그것은 실로 방대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무려 25년간 연 3천여 명의 학자가 번역 사업에 매달렸다.
박종국 [세종대왕기념사업회장]
"제일 먼저 세종실록을 시작을 했는데 세종실록만 하더라도 권수로 163권이 됩니다. 방대한 책이기 때문에 이게 과연 되겠는가, 염려도 했습니다만..."
북한도 리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을 끝냈다. 한문을 배격한 채 순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이제 실록은 CD롬으로도 제작되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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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제 실록은 한자 가득한 옛 책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실록의 내용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네, 이제 인터넷에서 실록을 검색할 수 있는데요. 실록 쩜 히스토리 쩜 지오 쩜 케이알을 치시면 바로 실록사이트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초기 화면이 뜨구요. 검색창에 찾고 싶은 내용을 치기만 하면 되죠. 음 뭘 쳐볼까요? 조선에는 없던 동물 코끼리를 쳐보겠습니다.
아, 네 신기합니다. 조선시대 태종 대 기록을 비롯해, 코끼리 관련 기사가 무려 37건이나 나오는군요. 그 내용을 보니 태종 21년에 일본에서 코끼리를 바쳤는데 이 코끼리가 엄청나게 먹어치우고 또 돌보던 관리가 밟혀죽는 사건이 생기자 코끼리를 전남의 해도에 유배를 보냈다고 하는군요. 또 다른 기사를 검색해볼까요? 얼마 전 대 히트한 영화 속의 주인공 공길입니다. 네 연산군 시대 공길에 대한 기사가 두건이군요. 공길이 논어를 읽은 것이 불경하다 이런 내용도 나오는 군요. 공길이 논어까지 읽었던 모양입니다. 이처럼 이제 실록은 우리가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지식과 정보가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군요, 조신시대 코끼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6천 4백만 자, 472년간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이제 우리 국민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엄청난 지적재산이 되었는데요, 그렇다면 실록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인조 27년 5월 8일 인조가 붕어했다. 실록의 제작은 왕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인조실록의 제작과정은 인조실록청 의궤에 잘 나타나 있다. 실록 편찬을 위해서 먼저 실록청이라는 임시기구가 설치된다. 실록청은 영의정부터 하급 실무진까지 대부분 겸직으로 구성된다. 인조실록의 경우 왕이 죽은 후 5개월 만에 실록청이 열리고 1년 후부터 사초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사초란 무엇일까?
인조 대의 사관이었던 정태제의 무덤. 묘 이장 과정에서 많은 유품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의복 등이 비교적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특히 유품중에는 정태제 친필 기록물이 나와 학계를 놀라게 했다.
“두권이거든요”
깨알 같은 기록물, 그것은 정태제가 기록한 사초였다.
정재열 [정태제 후손]
"이건 묘 이장하다가 발견된 사초입니다. 정태제 할아버님이 11대조 할아버지 되시고 인조 때 사관을 지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4세 때 과거에 급제하시고 그때 쓰셔가지고 같이 입관할 적에 같이 묻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태제의 사초는 실록에 얼마나 반영되었을까? 사초에는 ‘근안충신불사이군’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근안은 사신왈과 마찬가지로 사론을 뜻한다. 정태제의 이 사론은 인조실록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이태진 교수
"사초는 전임사관들이 왕의 말과 거동과 같은 것을 일일이 다 적어서 가지고 있다가 왕이 돌아가신 뒤에 실록청이 개설이 되면 거기에 모두 제출이 됩니다. 물론 10년 후면 10년 사이에 사관이 여러 사람으로 바뀌어겠죠. 그 여러 사람이 모두 제출하는 사료로 실록편찬에 아주 제1차 기초자료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초 외에도 다양한 기록이 실록의 자료로 이용되었다. 모든 관청의 업무일지인 시정기도 실록을 위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특히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기록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실록 편찬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였다. 국보 303호의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소실되었지만 지금도 3243권이나 남아 있는 방대한 기록물이다. 왕의 근황에 대해 새끼발가락까지 거론할 정도로 기록은 자세하다.
신병주 교수
"병진일이라는게 보이고 여기서도 역시 병진일이라는게 보이고, 그래서 이 승정원일기 내용을 보면 아주 많은 분량에 걸쳐서 문신수령의 필요성을 얘기하고 계속 국왕이 지시를 내리고 의견을 내고 하는 이런 내용들이 약 4면 21행에 걸쳐 자세히 기록돼 있는데 비해서 이 부분은 바로 숙종실록 같은 날짜의 기록들입니다. 그 똑같은 날짜 즉 7월 병진일에 이세백이 올린 보고의 내용을 실록에서는 약 10행에 걸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실록의 편찬에서는 승정원일기 내용 중에서 아주 핵심적이고 정말 후대에까지 널리 기록으로 남겨야 될 부분만을 특별히 뽑아서 실록의 자료로 활용을 했습니다."
이렇게 실록청은 사관의 사초, 각 기관의 업무일지인 시정기, 그리고 왕의 비서실 기록인 승정원일기와 개인 기록 등 실록편찬의 기초 자료를 먼저 수집했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실록 편찬에 들어갔다. 실록은 세 차례에 걸쳐 수정 되었다. 첫 편찬본을 초초, 그 다음 수정본을 중초, 최종 수정본을 정초라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후대에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는 기사들이 선별되었고, 마침내 실록은 완성되었다.
인조실록청의궤에 따르면 인조실록은 무려 3년 8개월 만에 완성된다. 그러나 실록 편찬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실록편찬의 마지막 공정을 보여주는 그림 한점이 전한다. 연산군일기 세초도, 흐릿한 그림은 물가에서 종이를 씻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바로 사초를 씻고 있는 것이다. 그 옆에는 잔치상까지 차려져 있다.
이성무 박사
"세자는 물에 씻는다는 것이고 초자는 사초라는 뜻입니다. 사초는 사관이 직접 적은 것 뿐만이 아니라 실록을 편찬할 때 3단계가 있다고 하죠. 초초 초고본입니다. 중초 중간본입니다. 정초는 마지막 정서본인데 그 양이 대단히 많지 않겠습니까? 이 많은 양의 기록을 그대로 놔두면 이게 비밀이 셀 가능성도 있고..."
서울 세검정 아래의 널찍한 바위 차일암, 이곳이 바로 사초를 씻던 곳이다. 바위 위에는 세초 때 차일을 치기 위해 팠던 기둥자리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세초하는 것으로 사관들은 실록 편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 심경을 읊은 시 한수가 전한다.
“십 년 만에 비로소 실록편찬의 일을 마치고
한가한 날, 사초 씻는 잔치를 열었네
저녁에 시냇가에서 밥을 지으니 맛난 음식이요
비 온 뒤의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 보다 낫네
지난 날 붓을 들었던 것이 이제 꿈결 같은데
완성된 책을 보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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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관, 그들은 누구인가?
세계적인 기록물인 우리의 실록, 특히 사론이라는 사관의 평가까지 곁들여진 실록은 왕이나 대신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사관들에 의해 자신들이 어떻게 후세에 역사로 남을지가 가장 두려웠던 것입니다. 실록과 실록의 자료가 되는 사초는 임금이라도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이나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보는 순간, 정국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초는 누가 기록했을까요?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바로 이쪽 그리고 저쪽에서 열심히 받아 적는 이들, 이들이 바로 사관인 것입니다. 이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낱낱이 기록한 사관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경남 밀양의 점필재 김종직 생가, 김종직은 조선전기 신진세력이던 사림파의 거두였다. 그러나 김종직은 무오사화와 관련,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 그가 연루된 사건은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 조선 4대 사화중의 하나였다. 그의 생가 뒤에 있는 김종직의 무덤, 무덤에는 사화가 불러온 비극이 서려 있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한 후 이장된 무덤인 것이다.
박석곤 [향토사학자]
"여기부터 남쪽으로 약 30리쯤 떨어진 곳에 무량원이라고 있었는데 세상을 떠난 직후에는 거기에 묘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오사화 때에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때는 시신을 모두 자손이나 유림에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수습했는지 확실히 않고 있다가 중종반정 이후에 이 자리에 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비극으로 확산되었던 무오사화의 발단은 사소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사림파에 맞서는 훈구파의 거두이던 이극돈이 김일손이 쓴 사초를 보게 되었다. 즉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의 사초에 이극돈의 부적절한 행태가 기록되어 있었고 이극돈은 이를 사초에서 빼달라고 부탁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처음에 무오사화의 시작은 이극돈이라는 실록청 당상이 실록청은 실록을 편찬하는 기관이고 당상관이기 때문에 일반 기사관이나 사관들의 직속상관입니다. 김일손이라는 사관이 이극돈에 대해서 그 당시에 아주 비판받을 수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극돈이 그 기록을 빼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손이 그 부분에 대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무오사화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당시 이극돈은 왕실의 상(喪) 중에 기생과 유흥을 즐겼다. 이것이 김일손의 사초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불리한 자신의 기록을 빼달라는 청탁을 거절당한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더 살핀다. 그러다가 특별한 기록을 발견한다. 바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생전에 쓴 조의제문이었다. 이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유적으로 비판한 김종직의 글이었다.
이덕일 박사
"조의제문은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의제로 죽인 항우를 수양대군 세조에 비유해서 수양대군인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영월 동강에 시신을 던졌다, 라는 사실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쓴 글인데 김일손이 이 글에다가 충분히 충성스러운 분노가 깃들어져 있다고 조의제문에 코멘트를 하는데 그 코멘트를 보고 유자광에 이게 바로 의제와 항우를 비유해서 단종과 세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해석을 해주므로..."
결국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김일손 등은 처형되었고 이미 죽음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었다. 사초로 인하여 사관과 그의 스승이 당한 조선 최대의 필화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사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사관의 자격은 엄격했다. 학식과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어야 했으며, 특히 사관은 사관이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새 사관을 추천한 사관들은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고유제를 올렸다.
[사필을 잡는 일은 나라에서 가장 높고 무거운 일이니, 추천된 자가 적임이 아니면 반드시 앙화가 따를 것입니다.]
이처럼 사관은 엄격한 자격제한과 철저한 검증으로 선발되었다. 오로지 사초만 기록하는 전임사관은 예문관 소속으로 모두 8명이었다. 이들은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초를 기록했다. 조선 왕가의 혼례행사를 그린 가례도감반차도. 이 그림에도 사관은 왕의 비서인 승지들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사관이 왕의 가까이 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사관은 왕의 기피인물 제1호였다. 왕이 기피하자 태종 때의 사관 민인생은 문틈으로 몰래 엿들으며 기록했다. 태종은 결국 사관 민인생을 쫓아내고 만다. 조선 초기 사관제도는 있었으나 아직 정착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계단아래에서 기록하기도 하고, 걸어가며 기록하기도 했다.
태종 4년 2월 8일. 태종이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다. 태종은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태종 실록은 사관이 모르게 하라던 태종의 명령까지 기록해두고 있다. 이처럼 사관들의 기록정신은 철저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사관, 사관이 왕 앞에서 앉아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대였다. 사관 제도가 시작된 지 100년 만의 일이었다. 이처럼 조선의 사관들은 숱한 견제와 위협,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역사를 기록했던 것이다. 바로 이들 사관들이 있었기에 조선왕조실록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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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관을 위한 노력들
네, 이곳이 바로 이번에 돌아온 실록이 보관되어 있던 강원도 오대산 사고입니다. 사고는 글자그대로 역사창고, 실록을 보관하던 곳이죠. 네, 사고를 빙 둘러 담이 있고요. 그리고 건물은 마치 누각처럼 높은 기둥 뒤에 지어져 있군요. 처마도 길쭉하게 나와 있고 이층에도 창도 여러 개나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깊은 산 속에 이런 사고를 모두 네 개나 지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실록이 불탄 뼈아픈 경험을 한 후 외적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깊은 산속에 사고를 지었던 것이죠. 그리고 똑같은 실록을 4부를 인쇄, 분산 배치했던 것입니다. 실록은 그 제작도 중요하지만 후세에 그대로 전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했습니다. 실록보관을 위한 조선시대의 노력을 보시겠습니다.
실록의 보존을 위한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자연 과학자들이 모여 실록을 세밀히 관찬하고 있다. 유난히 노란색을 띄는 실록, 조선 초기, 세종실록 정족산 본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실록에는 밀랍칠이 되어 있었다. 방충과 방습을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초기의 밀랍본은 어느 순간 중단된다. 밀랍본의 보존상태가 오히려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밀랍끼리의 화학작용이 보존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다. 밀랍본과 생지본의 비교, 오히려 밀랍을 칠하지 않은 생지본의 상태가 더 나았다. 중기 이후의 실록은 밀랍본 대신 이런 생지본이다.
조병묵 교수 [강원대 제지공학과]
"태조 때부터 시작해서 명종 대까지 13대 임금 전반부가 밀랍처리가 돼 있고 후반부는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시대에 했던 생지본 하고 밀랍본 하고 비교해보면 생지본은 원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상태가 좋은데 비해서 오히려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 밀랍처리 했던 것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이 아마 그 당시에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실록의 보관 문제였다. 실록의 보관 역시 과학적이었다. 실록은 특별 제작한 나무궤짝 안에 넣어 보관했다. 실록 형지안은 실록의 보관 관리를 기록한 책이다. 실록 형지안에는 보관하는 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궤짝 안에는 실록만 넣은 것이 아니었다.
배현숙 교수 [계명대학교 서지학전공]
"실록을 넣을 때 밑에 초주지를 깔고 이 초주지도 제일 좋은 종이라고 했습니다. 초주지를 깔고 그 위에 실록을 놓고 또 초주지를 깔고 실록을 놓고 하는 이러한 것들을 계속 반복해서 비단보자기에 싸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자 속에는 청궁, 창포를 같이 넣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습기를 제거하고 벌레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책과 책 사이에는 최고급 종이인 초주지를 넣었다. 책끼리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비단보자기에 싸서 천궁 창포등과 함께 넣었다. 이렇게 한 궤짝에 열두 권에서 열 세권씩 넣어 보관했다.
이런 실록 궤짝들을 보관하던 곳이 바로 사고이다. 지금의 오대산 사고는 1992년 복원된 것이다. 1910년대의 사진을 바탕으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사고 역시 실록을 가장 잘 보관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설명) 이병건 교수 [동원대 실내건축학과]
"이 건물을 보면 일반건물보다 처마가 훨씬 더 길게 뻗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안에 보관돼 있는 물건을 비나 눈이나 직사광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처마를 길게 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건물의 대부분의 하중을 차지하고 있는 지붕의 무게가 과도하므로 일반건물보다는 훨씬 더 큰 기둥과 주춧돌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또한 사고의 바닥은 지면과 떨어져 있다. 습기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창은 모두 이중창으로 되어 있다. 이 역시 환기와 온도를 적절히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사고를 둘러싼 담 역시 이중담, 산불로부터 사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나무궤짝을 사고에 보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실록형지안에는 曝曬(포쇄)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병주 교수
"조선시대는 사고에 보관한 실록을 보다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그 실록을 병충해나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포쇄라는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포쇄는 이제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작업을 말하는데 보통 왕명을 받은 사관이 주관하여 약 3년을 사이로 해서 실록을 포쇄하는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포쇄는 보관중인 실록을 꺼내 말리는 작업이었다. 3년에 한 번씩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늘에서 말리면서 벌레와 습기를 막았다. 지금은 온전히 우리에게 전해지는 조선왕조실록,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 노력의 결과였다. 정읍의 남천사에는 두 사람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안의와 손홍록. 이들이 바로 목숨을 걸고 실록을 지킨 이들이다.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는 모두 불타고 전주사고마저 위험해 처하자, 전주지방의 유생이던 두 사람은 사람들을 모아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그들이 처음 실록을 보관했다던 은봉암은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김희선 정읍문화원 사무국장
"교통편도 불편하고 이고 매고 짊어지고 우마차를 이용해서 이 험난한 계곡까지 운반한 그런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 분들의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태조에서부터 명종에 이르는 조선초기 200년의 역사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임진년 가을, 일본군은 전라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을 더 높은 곳인 이곳 용굴로 옮겼다. 안의가 남긴 임계기사, 두 사람이 실록을 지키기 위해 숙직을 한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은 내장산에서 370일간 실록을 지켰다. 일본군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자, 이들은 급기야 실록을 해주의 임금에게 갖다 바친다. 정읍에서 해주까지 천리가 넘는 길, 수백 명의 백성과 관원들이 나서 전주사고의 실록을 살려냈던 것이다. 그 실록이 전해져 지금은 가장 안전하고 가장 완벽한 환경에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이태진 교수
"조선왕조실록은 500년의 조선역사의 기록입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장기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듯이 이것은 기록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역사 차원에서 보면 만약 실록이 없었다고 보면 연려실기술 등 개인 저술 등을 기초로 해서 우리가 연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고문서들을 수집해 가지고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 노고를 실록이 확 덜어줍니다. 그래서 해방 이후에 우리 역사학이 늦게 출발했지만 상당한 수준에 적어도 조선왕조역사로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실록 덕분이 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안에 담긴 기록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역사인 조선왕조실록, 93년 만의 귀환으로 조선왕조실록은 그 수난의 역사를 마감하고 영원히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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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실록과 기록정신
이제 우리는 남아 있는 실록을 모두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인에게 자랑할 수 있는 기록들을 온전히 갖추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정확한 기록과 완벽한 보존이 화두였습니다. 기록은 유교적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춘추필법을 따랐습니다. 이는 왕과 관료들을 가장 확실히 견제하는 장치였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화, 필화사건들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그 정확성과 방대한 양,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기록으로 세계최고의 실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실록의 보존 또한 숱한 위기를 넘기면서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 조선왕조실록은 우리의 보물창고가 되었습니다. 학자, 예술가, 일반인 할 것 없이 누구나 실록을 마음껏 들여다보고 여기서 수많은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역사적 교훈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한 궁극적인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 글의 내용과 이미지의 저작권은 KBS HD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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